SCP-ZH 공식 인정 요구와 그 이면의 사정
SCP 재단은 이제는 그 설정과도 같이 범국가적인 활동을 하는 웹사이트가 되었습니다. 전 세계의 사람들이 SCP 재단이라는 소재를 매력적으로 느끼게 되어, 점진적으로 활동수가 늘어나는 사이트가 되었습니다.
또한, SCP 재단만의 매력으로는 지부(Branch)라는 각기 다른 웹사이트를 운영함으로써 각 지역과 언어에 맞는 SCP를 창작해내고, 이를 INT라는 교류의 장을 활용하여 번역 등으로 교류하는 구조에도 있습니다. 1
이전에는 오로지 SCP-EN에 영작해서 "공식"으로 올라가는 것이 각 SCP 지부의 목표였다면, 지금은 각 사이트가 모두 공식이 되어 어디에 SCP를 적더라도 모두 공식적인 SCP 활동이 되는 것이죠. SCP-KO(설립 당시 SCP-KR)를 설립하면서는 한국어로 된 자체적인 공식 SCP를 창작하는 취지가 가장 바람직한 형태로 자리 잡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한국 시각으로 2020년 10월 18일 자정 무렵, SCP-INT에 하나의 게시글이 올라오게 됩니다. 중국어 번체자 위키인 SCP-ZH 사이트(http://scp-zh-tr.wikidot.com/)를 공식으로 만들어달라는 요청입니다.
SCP-INT에서는 그동안 쌓인 노하우를 바탕으로 일종의 공식화를 위한 지침이 만들어졌었고, 따라서 이러한 지침을 잘 지킨다면 공식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습니다. 물론 SCP-ZH 역시 이러한 지침을 충실하게 따라서 만들어진 곳이었죠. 이 지침은 다음과 같습니다.
- 기본 골자 완성(우선도 A)
- 유산 모음을 번역할 것(우선도 B)
- 다른 (사이트의) SCP를 번역할 것, 중요하거나 아닐 수 있음
- 자체 SCP를 보유할 것(20개 정도)
- 10명 이상의 활성 회원을 가지고 있을 것
- 활성화된 소셜 미디어 계정을 가지고 있을 것
- 로드맵의 단계를 따르고 그 로드맵을 우선순위대로 실현시킬 것
새로운 SCP-ZH는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치명적인 문제는 사이트를 공식으로 올리는 것 자체가 2020년 현재 논란거리가 되는 실제 정치적 사항을 끌고 들어올 수 있다는 점입니다.
SCP-ZH 공식화를 할 경우의 문제점
번체자는 대만, 홍콩, 마카오 등에서 사용하는 문자로, 중국에서는 번체자가 아닌 간체자를 사용 중에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 SCP-ZH를 "공식화"하는 것은 단순히 커뮤니티 사이트가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SCP-KO 다음으로 공식화된 SCP-CN이 중국의 황금방패라 불리는 웹사이트 차단 시스템의 블랙리스트에 올라갈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일 수 있습니다. 나아가 모든 중국 유저들이 SCP 재단 전체(특히 위키닷)를 이용할 수 없게 될 가능성도 있죠.
이러한 제반 사정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복잡한 중국과 다른 각 나라의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합니다.
하나의 중국과 양안관계
지금의 중국이라고 불리는 중화인민공화국은 오래전부터 하나의 중국이라는 이데올로기를 고수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대만, 홍콩, 마카오 등 예전 식민지로 인해 분단되었던 지역에 대해서도 같은 "중화인민공화국" 소속으로서의 정체성을 강요하고, 나아가 전 세계에 이러한 사상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마카오는 포르투갈의 식민지였고, 홍콩은 영국의 식민지였다가 중국으로 반환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식민지였다가 반환된 대만의 경우 국공내전에서 패배한 국민당이 타이완 섬으로 들어오게 되면서 대만에 "중화민국" 정부가 들어서게 되고, 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 양국의 논리가 "하나의 중국"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의 중국" 원칙은 중화인민공화국, 그리고 중화민국 역시 같은 논리를 가지고 있지만, 세부적으로 봤을 때 그 주체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달라집니다. 여기서 말하는 "중국"이 중화인민공화국이냐, 중화민국이냐에 따라서 양국의 논지가 달라지게 되는 것이죠.
따라서 이러한 양안관계는 대한민국과 북한 간의 분단국가의 개념으로 이해하시면 어느 정도 쉽게 다가올 수 있습니다. 완벽히 같은 것은 아니지만, 서로 간의 정부를 헌법상의 괴뢰정부로 보고 자신의 정통성을 내세우는 것만 본다면 이는 완벽하게 대한민국과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의 관계와 들어맞게 되니까요.
홍콩과 마카오 역시 반환받은 지역인지라 사실상 중화인민공화국의 실효권이 미치는 영토로 보이고 있으며, 이들의 독립을 주장하는 사람 역시 소수에 불과한지라 그동안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는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2014년의 우산혁명과 2019-2020 홍콩 민주화 운동으로 인해 홍콩 독립에 대한 관심이 세계적으로 많아지고 있어 하나의 중국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크게 늘어났습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이러한 상황에 대해 철저한 무관용과 무타협을 내세우고 있으며, 여러 나라에게 여전히 중화민국과의 동시수교를 없애라는 원칙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가 중화인민공화국이 하나의 중국임을 명시하고 있고, 중화민국과는 비공식적 수교를 하고 있죠. 이는 2020년 들어 G2라고 불릴 정도로 국력이 강화되고 UN 상임이사국으로서 자리하는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관계를 끊을 수 없는 나라들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적 발언에 대해 매우 강한 검열을 시행하는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황금방패(金盾工程;금순공정)"라고 불리는 인터넷 검열 시스템을 통해 중국인들의 인터넷 생활을 감시하고 차단하고 있습니다.
황금방패
황금방패는 SCP 재단 설립 초창기부터 유명해서, SCP-CN 유저들은 이미 위키닷의 오픈소스 프로젝트를 통한 자체 서버에 위키닷을 올리는 방식에서 위키닷 서버로 들어온 케이스입니다. 2013년까지만 해도 위키닷은 황금방패에 가로막혀서 중국 유저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곳이었기 때문이었죠.
이와 같은 방식으로 계속해서 사이트가 폐쇄 혹은 이동이 반복된다면 전반적인 SCP 재단 커뮤니티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 자명합니다. 특히나 이러한 대규모 이동에서 가장 문제가 되어왔던 것이 바로 원저작자를 잃게 되어 누가 이 SCP를 창작했는지를 모르게 되어버리는 경우입니다.
최악의 경우는 바로 중국 유저들에게 직접적인 피해가 가해지는 경우입니다. 중국에는 황금방패를 통해 중국 공산당에 대한 반사회적 발언을 하는 사람에게는 직접적으로 공안이 찾아가 제제를 가하는 경우가 있으므로, 이러한 공식화가 중국 공산당의 입장에서 봤을 때 "반동분자"들의 소굴로 비칠 수 있다는 것이죠.
SCP-ZH 공식화를 하지 않을 경우의 문제점
반대로 공식화를 거절하는 것도 문제가 됩니다. 중국은 2020년 중국 우한에서 생겨난 코로나19의 근원지이며, 이를 통해 전 세계적인 팬데믹을 일으킨 주범입니다. 또한 중국의 시장 개방으로 인해 많은 기업이 그 내수시장에 주목하고 있으며, 중국은 이를 이용하여 세계 각국의 기업에게 자신들의 정치적 요구를 주입하고 있습니다.
2019년 말에는 블리자드가 하스스톤 경기에서 홍콩시위를 지지한 프로게이머와 해설진에게 과도한 처벌을 내려 문제가 된 적이 있었고, 2020년 개봉한 디즈니의 영화 뮬란은 배우가 홍콩 시위를 진압하는 경찰의 폭력을 정당화하고, 위구르족 인권탄압 단체에게 크레딧으로 감사를 표하는 등의 행보가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SCP 재단이 SCP-ZH의 공식을 거절할 경우에는 SCP 재단 역시 중국 공산당의 사상에 동조하여 이를 지지하는 커뮤니티로 비칠 수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즉, 현재로서는 어떠한 선택을 하든 간에 문제가 될 여지가 있는 진퇴양난의 상황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해결방안은?
1. 국가가 아닌 언어코드로서의 등록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느 한쪽의 선택이 아닌, 신중한 제3의 선택지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따라서 정치적인 측면이 아니라 단순히 "언어의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한 명분을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SCP 재단은 단순히 나라만으로 각 지부를 구분하는 것이 아닌, 언어 중심으로 하여 나눈 곳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곳이 한국어 위키(SCP-KO)이죠. 따라서 언어적 구분을 위해 번체자 위키를 만들었다고 하는 명분을 만든다면 어느 정도 감시의 눈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중국어 위키백과(https://zh.wikipedia.org/)를 비롯한 위키백과 전체가 황금방패에 차단을 당한 전적으로 보건대, 아무래도 이러한 해결방안은 근본적으로 무언가를 해결할 수는 없어 보입니다.
2. 공식화의 폐지
현재의 구조를 바꾸어, "공식화"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서의 협력을 도모하는 것입니다. SCP-INT 출범 이후에는 사실상 공식화의 의미보다는 자연스러운 문화교류의 의미가 더 강해지기 시작했으므로, 이제 공식/비공식과 같은 상하관계보다는 좀 더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사이트를 유지하는 것이 좋을 수도 있습니다.
특히 2017년에 SCP-EN이 라이선스를 구실로 한 SCP-RU 공식화 배제사건으로 인해 강제적인 라이선스 변경이 있었던 것을 생각해본다면, 조금 더 원만하고 각 사이트의 자율권을 지향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좋습니다.
3. 정치적 내용의 제한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라고 하기엔 어렵지만, 정치적 내용을 배제한 글만 쓸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표현의 자유라는 문제에 다시금 봉착하게 되어 있고, 여전히 SCP 재단이 중국의 눈치를 본다는 꼬리표가 따라붙을 가능성이 남을 수 있습니다. 또한, SCP-ZH의 존재 목적이 사실상 "중국어 사용자가 어디서 왔든 억압과 검열 없이 글을 쓸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讓中文使用者在免於壓迫和審查的前提去寫作,不論你來自哪裡。)"라는 것에 있음을 본다면, 이런 해결방안은 실행하기엔 메리트가 없어 보입니다.
글을 마치며
최대한 정치적 견해를 배제하며 글을 쓰려고 노력했지만, 아무래도 모자란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SCP 재단의 각 관리자의 현명한 판단과 어쩌면 대대적인 구조변경이 필요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재단의 외부적 사정이 아니라, SCP라는 세계관 안에서 글을 창작해내는 작가에게 먼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작가가 작가의 일을 하고, 스탭이 스탭의 일을 하는 것이 이상적인 것이 아닐까요. 이 글을 읽으시는 SCP 작가분이 계시다면, 외부적인 정치적 문제는 스탭에게 맡기고 원하는 내용의 글을 쓸 수 있는 자유를 누리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적어도, warning.or.kr에 검열받지는 않으니까요.
개인적으로는 이 일이 원만하게 해결되었으면 좋겠습니다.
Devan
참조
- 편의성을 위해 지부라고 명기하나, 각 사이트마다 명칭과 의미가 다를 수 있습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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